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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성장

시아버지의 요양원 입소날

글꽃앤 2023. 4. 23. 22:48

 

아버님이 요양원으로 들어가시던 날

 

아버님이 몇 주 전 요양원에 입소하셨다. 그날 자식들은 모두 모였다. 마치, 세상에서 마지막인 것처럼  아버님을 배웅했다.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그날을 되짚어 이 글을 쓰려니 다시, 그때의 기분이 된다.

 

시어머님이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홀로 아파트에 사셨다. 4년 넘게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계셨다. 아버님은 매일어머님 간호에 정성을 쏟으셨다. 당신만의 일처럼 그동안 어머님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이라도 하듯이 마음을 다하셨다.

 

코로나로 병원출입이 제한되기 전까지, 아버님은 매일 아침 과일을 갈고, 간식거리를 마련해서 어머님께 갔다. 아버님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어머님의 병간호를 할 줄 몰랐다. 정말 어머님은 행복한 병원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어머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아버님은 건강이 꽤 괜찮은 편이라 당신이 사시던 아파트에서 계속 사셨다. 큰아주버님이 두 주에 한 번씩 와서 반찬과 먹을거리를 해놓으시고, 아버님을 챙기셨다. 그럭저럭 다른 자식들도 가끔 찾아뵈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아버님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아버님이 혼자 밥을 해드시기 어려워지셨다. 가끔 소변도 실례를 하는 정도로 뇌기능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큰 아주버님이 상주하며 아버님을 돌봐드렸다.

 

노인의 뇌경색이 빨리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그래서 큰아주버님이 혼자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둘째인 우리와 셋째가 있고, 막내딸이 있어도, 모두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자주 갈 수가 없었다. 큰 아주버님이 거의 다 하시고, 다른 자식들은 한 달에 3일 정도 돌아가면서 아버님을 돌봐드렸다. 

 

돌아가면서 조금씩 돌봐드리고, 큰아주버님이 거의 모든 시간을 아버님과 함께 하셨다. 조금씩 아버님의 상태는 나빠졌다가 좋아졌다가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큰 아주버님만 하라고 하기가 난감했다. 그러던 중에 아버님의 시설등급이 나와서 요양원에 가실 수 있는 요건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모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시길 바랐지만, 내가 전적으로 하지 않는 바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다른 형제들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큰 아주버님께 모든 희생을 하라고 할 수 없었다.

 

아버님은 처음엔 요양원 입소를 완강히 거부하셨다. 아버님이 생각하는 요양원은 어머님이 4년 넘게 계셨던 요양병원을 생각하셨다. 또한 지인들 계시던 곳을 가봤기에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에 아주 부정적이셨다. 

 

모든 노인들이 아버님처럼 요양원에 들어가시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나라도 그럴것이다. 노인들만 가득 있고, 출입의 자유가 없는 그곳을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기쁜 마음으로 요양원을 가는 노인은 없을 것이다. 다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 마지못해 할 수 없어 가실 것이다.

 

큰아주버님은 점점 지쳐갔다. 4년 반 동안 어머님 병원에 다니면서 어머님과 아버님을 돌보다가, 이젠 아버님을 전적으로 돌보고 있으니, 은퇴 후 자신의 삶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형제들도 할 수 없이 요양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86세 노인을 60이 넘은 남자가 집에서 계속 돌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세 끼니를 차리고, 집안일을 하고, 병원을 다니고....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아버님이 요양원에 가시겠다고 하셨다.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시더니,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시고 결심을 하신 것 같다. 큰 아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셔서 그런지 아버님이 요양원에 가서 적응을 해보겠다고 하셨다.

 

마침, 가까운 곳에 A등급 요양원에 자리가 하나 난다고 해서 거기로 정했다. 남자노인은 자리가 얼마 없어서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우린 자리를 얻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요양원 입소 날이 정해졌다. 입소날은 자식들이 다 와서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한다. 아버님 계신 곳이 지방이라 우리들은 아침 일찍  그곳으로 향했다. 

 

남편은 일주일 내내 마음이 불편한 듯 잠을 설쳤다. 끝까지 자식노릇을 못해서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랫동안 집에서 계시게 하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우린 죄스런 마음을 안고 아버님 댁으로 갔다.

 

미리 도착한 큰서방님 부부가 요양원 입소에 필요한 서류와 옷가지를 챙기셨다. 거실에 아버님은 앉아 계시고 아무 말씀 없으셨다. 정말 쑥스러웠다. 자식들이 힘들다고 요양원으로 보내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죄송해서, 아버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다 되어 요양원으로 가자고 하니, 갑자기 아버님이 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그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앉아계시다가 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아버님은 평생 기독교인으로 교회 장로까지 하시 분이시다.

 

" 하나님, 제가 이 집에서 잘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여기를 떠납니다. 거기서도 잘 살게 해 주세요... 아멘." 

이런 기도였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님은 이 집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계셨다. 감사함으로 자유롭게 산 인생을 마무리하신 것이다.

 

아버님이 기도로 집에서의 생활에 마침표를 찍으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숙연해졌다. 아마도 아버님은 다시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와 예전과 같은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신듯하다.

 

자식들의 사정으로 정다운 집을 떠나시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씁쓸했다. 부모님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건만,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도 아버님을 행복하게 못해드렸다.

 

열 자식 보다 마누라가 낫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아마, 어머님이 살아계셨다면 당연히 아버님은 집에서 살 수 있으셨을 텐데....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렇게 집을 떠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부가 해로하다가 한 사람이 떠나면, 한 사람은 쓸쓸히 요양원에서 지내게 된다. 처음부터 자식과 함께 살았다면, 아니, 어느 한 자식이 끝까지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나서면, 그런 분은 집에서 사는 행운을 누릴 것이다.

 

요양원에 도착해서 많은 서류에 싸인을 하고  아버님이 계실 방으로 갔다. 1인실 방으로 아담하고 깨끗하게 보였다. 화장실도 안에 있고, 도와주는 요양보호사도 인상이 좋아 보였다. 우린 그곳을 둘러보고 조금 안심을 하였다. 관리자가 이젠 나가야 된다고 해서 아버님과 작별인사를 했다.

 

손을 잡고 잘 계시라고, 건강하시라고 인사했다. 정말 못할 짓처럼 느껴졌다. 아버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민망했다. 어린아이 떼어놓고 도망가는 에미 같았다. 요양원 보내기가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버님을 버리는 날이었다.

 

정말 이런 자리엔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다 일을 마쳐주면, 나중에 찾아뵙고 싶었다. 이런 자리에, 이런 낯 뜨거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정말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부모님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아버님이 이 못난 자식들을 원망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냥 부족한 자식들이구나....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빌뿐이다. 그 마음에, 그 쓸쓸했을 마음에, 원망의 마음까지 얹혀주고 싶지 않다.

 

아버님....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부디 그곳에서도 좋은 것이 한 가지라도 있길 바래요.

 

 

노인들 산책
숲속에서 자유로운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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